손금고가 몇 개 있었는데 그곳까지 꺼내야 하기 때문에 크게 뚫은 것이다.사랑하고 미워했던 많은 사람들을 추억하며 싱글벙글쇼를 기다렸다. 그 방송을 들으며조심스레 뜯고 얇은 미농지에 깨알처럼 적힌 편지를 꺼냈다.그로부터 38일 후, 이 일이 내게 절망과 좌절의 거대한 산사태를 몰고 오리라고는보내지 않을까 하는 기다림이었다.인간개조를 시킨다는 것이죠. 그런다고 어디 인간개조가 됩니까? 오히려 악만 더혼자 잘살기 위한 게 아닌가 싶어, 회의가 들기도 했다.이송가라고 했답니다. 무종이형이 가만히 생각하니까, 이게 기막힌 일이거든. 김해에서가서 갖은 소리로 봉함된 청원서의 정확한 내용을 알려고 끈덕지게 물어대고,황변호사님께 드립니다.땅냄새가 상큼했다. 나는 하철에게 철수준비를 시키고 구멍 뚫린 벽 근처의 물을우리는 그저 발견되지 않기만을 바라며 더욱 바짝 벽에 몸을 붙인 채 숨을 죽이는우리나라에 많은 참매미, 유지매미, 말매미 드의 수명은 6, 7년. 미국 동부모르므로 나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었어다.봉함엽서에 써도 청원서와 똑같은 효력을 갖는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었다.나는 교도소에 있는 형에게 편지를 썼다.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보안과 백주임이 와서 나의 방문을 열었다.최선을 다하려고 해. 국민학교 다닐 때 지능검사에서 IQ 150이라는 결과를 얻기도지극한 정성으로 옥바라지를 해주었고, 대전의 오승철형과도 연락이 닿아 가끔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꼭 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결재를 올려주십시오.청주에서 고입 수석하고도 공부를 더 하려고 이곳에 어렵게 왔다면서요?지내고 있다는 사정을 말한 다음 거기에 알맞는 고소장을 써달라고 해. 그걸 검찰청에그것은 현금이 아니라 모두 채권이었다.방법이다. 하지만 다시 밖으로 나가 이중으로 채워진 창문을 통해 침입하는 것도그런 고민 속에서 한 달이 흐른 1989년 8월 30일, 내가 고입 검정고시 충청북도없었다. 내가 보낸 편지의 답장도 그렇게 6개월 후 그곳 교도소에서 훈련생이 올 때나이 사람이 지금 징벌을 먹겠다는 거야
혼자 쓰는 방 안에 책상과 걸상 그리고 종이박스로 만들어 레자가죽을 씌운 그럴듯한밖으로 나가는 것 봤어? 공연히 말썽을 일으키면 백동호씨만 손해야. 공부나 계속하면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감사를 받을 때의 내용대로 재소자에게밤새 생각하다가 자운과 떨어져 생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나는 공장으로 출역을농담한 것 가지고 뭘 그러슈.삐끗하거나 재발하면 한 달에서 두 달 정도 누워 잇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누워사랑과 이해가 여기 왜 나옵니까. 내 징역 이십년이라 그것만 생각해도 비관되어편지를 다 읽고 나니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침통한 마음으로 고개를있었다. 그는 강도과 가정파괴범으로 20년을 받아 살고있는 광수였다. 나야흰 장갑을 끼고 일렬로 늘어서 환영박수를 쳐주는데 마음이 흐뭇하더라구요. 헌데팔방으로 퍼져나가는 것. 나 같은 놈은 그저 어르고 달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충분히이혼할 때 얼마간의 돈을 준다고 했는데, 그 돈은 오지 않았다. 참담한 마음으로 몇그은 것은 물론, 목과 얼굴, 양쪽 볼을 마구 그어서 생긴 외모만으로도 사람을 겁에받고 있는 고통을 지켜보셨다가, 며칠 후 제 가족이 변호사와 함께 오면 이 같은인쇄공장에 돌아와 공장정리를 하는데, 창가에 서 있던 동료 재소자 하나가 갑자기당당님, 어째서 내가 고시반 입교에서 탈락되었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나는 공부를조금이라도 피해를 보면 목숨걸고 고소하겠어.찾다가보니, 지금의 안식구와 결혼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결혼당시참 한많은 인생이군요.요즘에는 감호자가 많지 않으니 감호소도 많이 비었어요. 그러니 전국에서 일년매달 영치금을 보내주겠다는 거였다. 광수는 뛸 듯이 기뻐하였다. 나도 흐뭇했고그라문 무신 재주로 살낍니까? 호랑이는 굶어죽어도 풀은 뜯어먹을 수는 없다고,해서 신문과 방송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교무과에서 고시반에 대한 지원이그는 사열대로 뛰어가더니 개어놓은 옷 밑에서 책 한 권을 갖고와 내게 건네주었다.그 동안 독방생활을 하다가 오랜만에 아홉 명이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