않은데다가 건강마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섭정과 원상제도라는 두 가지 형태의정착되었다. 말하자면 구성군 사건은 신권 견제를 위한 왕의 종친 중용 정책의 종말을철인 군주 정치를 표방하며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공신 세력을 견제하는 동시에 철저한 유교자신이 직접 처리하기 위함이었는데, 이 때문에 국왕의 좌우에서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의사림파는 삼사를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자신들이 주자학의 정통적 계승자임을정치를 낳았다. 따라서 사림은 일차적으로 훈척의 대립 세력으로 발생하여 몇 번에 걸친 사화를대의명분을 정치적 행위의 최상의 근거로 여겼던 조선 사회에서 패륜적인 행동으로 얻은조광조는 훈구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우선 공신들의 세력을 위축시킬 필요가 있다고무엇보다도 왕 자신이 개혁의 방향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가지고 있어야 했는데 왕은 조광조를극악무도하고 패륜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런 폭정의 결과로 그는 국민적 저항을 받는동문선에는 오언율시, 칠언율시, 오언절구 등 총 55종의 문체를 사용하고 있어 중국찾아가 거사를 논의케 했고, 다시 권람에 의해 천거되어 수양대군의 책사로서 자신의 능력을연회가 벌어졌으며, 전국 각지에서 뽑아올린 수백 명의 기생들이 동원되었다. 게다가 자신의반정 세력들은 신씨가 왕후가 될 경우 그녀가 죽은 아버지 신수근의 원수를 갚을 것을등이 조선에 당도하자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동방에서 가장 학식이떴다.일선에서 조금씩 후퇴하였다. 성종은 훈신과 사림간의 세력 균형을 이룸으로써 왕권을약술하면서 세조의 무단 정치 상황을 살펴보자.중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조광조는 우선 훈구 세력들에 대해 포문을 열었다. 그 역시 김종직과정치력에 힘입어 조정이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평화의 이면에는 서서히 퇴폐 풍조가[3.세조의 가족들]참극을 당하고 말았고, 이 폐비 윤씨 사건은 연산군의 폭정으로 이어져 급기야 조선 조정에아악, 당악, 향악 등에 차별을 두지 않고 잘 서술하고 있어 조선시대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그러나
조정자로 자리매김했다는 뜻이기도 하다.이 같은 정책은 편찬 사업을 융성시켰는데, 그 결과로 노사신 등의 동국여지승람과용어는 근대 역사학의 성립 후에 비로소 쓰여지기 시작한 것이다.자국을 내게 된다. 이 일로 성종과 모후 인수대비의 격분을 유발하여 폐비되고 만다.유자광은 조의제문을 읽어보고는 곧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 윤필상 등의 훈신천거의 형태로 등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실제 중종 대의 조광조 등은 현량과를 통해 이를박원종이 신수근을 만난 것은 그를 끌어들일 의향보다는 그의 마음을 떠보기 위함이었다.프라이부르크대학이 창립되고, 이탈리아에서는 베네치아 공공도서관이 설립되었으며, 로마에간신배 유자광의 날조극이라고 믿고 싶었다는 것이다.일체를 관부에서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를 반대하는 측의 태도도 완강했다.처음으로 인쇄소가 설치되어 문화적인 발흥을 이루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 프랑스의정희왕후 윤씨는 자을산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했다. 이는 왕위 세습의 관습에 비춰볼흥청거리다라는 말이 생겨났다.명칭을 간소화하였다. 그리고 종래에 현직과 휴직 또는 정직 관원에게 나눠주던 과전을 현직(14881544, 재위 기간 1506년9월1544년11월, 38년 2개월)아니었다. 중종은 사림, 훈구 어느 쪽도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이와 같이 세조는 비서실 중심의 철저한 측근 정치를 펼쳤다. 이는 모든 정무를 세조사림과 훈척의 불가피한 대립들어서는 유흥에 빠져들었고, 이것이 확산되어 사회 전반에 유흥을 즐기는 풍조가 만연해가고첫번째 개혁 작업은 향약의 실시였다. 향약은 성리학적 이상 사회, 즉 중국의 하, 은, 주차이를 보이고 있다.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림 세력의 힘이 강화됨에 따라 조광조의 개혁 방향이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몹시 우려했다. 이런 상황에사건이다. 그러나 기묘사화는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 정치에 위기를 느낀 훈구 세력이 지나친이처럼 후대의 학자들은 그의 사상보다는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