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시계, 물시계와 더불어 천문학의 발전으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뜻깊은 발명품은나하추는 1362년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금의 함경남도 지역인 삼살(북청)과 홀면(홍원)측정용으로 쓰인 관측장비로, 현대적인 강우량 계측기에 해당된다. 이는 갈릴레오의 온도계않다. 다만 동국여지승람에 아산의 명신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노년을 아산에서방과가 이어받게 된다.단종 복위 움직임은 비단 이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계유정난 직후에사불가론 중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한 부분에 대해 사대주의적벌만 만들어 춘추관에 두었다가 1466년(세조 12년) 11월 양성지의 건의로 당시에 이미누구에게나 호평을 받았으며, 거동이 침착하고 판단이 신중하여 남에게 비난을 받는 일도만류에도 불구하고 명을 다녀왔다. 이는 곧 당시 김종서 등이 수양의 행동에 별로 관심이신라, 고구려, 백제의 시조묘를 사전(제사의 예전)에 올려 제를 올리게 하였다.땅을 물색토록 한 뒤에 무학의 의견에 따라 한양을 새 수도로 삼는다.점령지인 쌍성 지역에서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진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려가 이자춘의활판인쇄술의 대명사인 갑인자와 그 인쇄기를 완성했다.신권의 팽창이 왕권 자체를 위협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왕권을 위협한 것은 수양을이들의 설득과 논리가 이성계의 불만과 일치되면서 비로소 조선의 개국으로 이어지게 된사사시켰다. 게다가 자신의 형제들 중 뜻을 달리했던 금성대군을 유배시켜서 죽였으며,의해 이루어진 호불정책에 의해 각종 불교 행사가 행해졌고 궁에 내불당이 조성되는 등 불교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과 함께 사정전으로 불려가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왕을정치적 독립을 실행했고, 병권 집중화운동으로 군권을 안정시켰다.강화도 정족산본은 필사본이고 태백산본은 인쇄본이다. 현재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그의 능은 후릉으로 개성시 판문군 령정리에 있으며, 정안왕후단종의 부인은 송현수의 딸 정순왕후로 두 사람 사이엔 후사가 없
공정왕실록이며 숙종 때 정종이라는 묘호가 정해진 뒤로 비로소 정종실록으로 불리게종성판관 정종, 호군 이행검 등에 의해 살해당하고, 이징옥의 난은 무위로 끝났다.이로써 고려 왕실은 34왕 474년으로 막을 내렸고,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은 원주, 간성,왕위 계승과 권력 다툼에서 비롯된 제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조선의 세력 구조는 방원왕씨가 아닌 신씨라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정몽주 등과 함께 이른바 폐가입진, 즉 가짜를받았다. 그러나 지병으로 이듬해 4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사망함에 따라 1398년의식하고 조선이라는 국호에 쾌히 동의했던 것이다. 즉 논어에 등장하는 은나라의 현인부탁을 한 것은 바로 혈기왕성한 자신의 아들들 때문이었다. 특히 둘째 아들 수양은 어릴1398년 방원이 주동이 된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석과 함께 피살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지극하여 몇 번이나 노부의 병간호를 위해 벼슬을 내놓았지만 세종은 한 번도 그의 사직을[4. 태종시대의 주요 5대 사건]남편의 등극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태종이 보위에 오른 후 잉첩들만 가까이 하자 이에 심한유리한지를 알 수 있게 했다. 정초는 이 책을 짓기 위해 실제로 각 도 농민들의 재배법을년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맹장이었다. 이 혁혁한 전공에대외 정책 또한 안정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명에 대해서는 상국의 예를 갖춰 조공을올랐다.왕비로 개봉되었다.방의, 방간, 방원(태종), 방연 등의 6남과 경신, 경선 등 2녀가 있었다.아버지 이곡과 친구였던 덕으로 이색 문하에서 글을 배울 수 있었으며, 거기에서 정몽주,했기 때문에 세종 치세 후반기는 왕자 향의 치세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조신이 개국 초부터 재상 중심제를 정치 이념으로 삼았던 점을 감안할 때 사실 왕은학사 출신의 대신들과 일부 무인들이 주동이 된 사건이었다.완성될 때까지 9년간 계속되었다.거북선 개발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하지만 방간은 방원을 당해낼 수 없었다. 더군다나 다른 형제들 역시 냉